밤문화 정보

밤문화

밤문화 세계 각국의 밤 문화 정보 입니다. 세상은 정말 넓고 사람들도 다양하게 많습니다.
그중 정말? 이런게 있다고 할 정도의 특이한 나라별 밤 정보를 알아보겠습니다.

일본의 밤 문화 '요바이'

요바이란 남성이 한밤중에 성관계를 목적으로 다른 여성의 집에 침입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밤에 남의 집에 들어가 마음껏 성관계를 할 수 있는 문화인 것인데요.
얼핏보면 여성에게 너무 가혹한 문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여성에게는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남성은 가족들을 보초로 세워
요바이를 막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들어가는 것에 성공했다면 그냥 팔자이려니 하고 여자쪽에서 수용을 했다고 하네요.

터치

그렇다면 왜 이런 풍습이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결혼의 수단

입니다. 혼기가 찬 여성의 경우, 지역 유지인 촌장의 공인 아래 요바이가 성립되었습니다.
한 명의 여성에게 여러 명의 남성이 구혼을 하게 되는 경우, 촌장의 주관아래 밤에 숨어들기를 할 사람들의 순서가 정해지고 차례차례
남자가 옵니다.
요바이 기간 중 임신을 한 경우 여자는 그 동안 요바이한 남자들 중 배우자를 고르는 것이 가능했다고 하네요.

요바이의 규칙

밤 문화를 지배했던 ‘요바이’는 여러 위험요소가 많았던 만큼 일정한 룰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이 룰은 마을 마다 달랐는데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여자라면 누구나 ‘요바이’의 대상이 되거나 젊은 여성, 과부, 하녀, 유모만 ‘요바이’ 대상
으로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또 동거남이 있거나 이웃마을 여자는 범해서는 안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룰을 무시하거나 다른 마을 남자가 ‘요바이’를 하러 오면 반죽음 상태가 되거나 맞아 죽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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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바이는 더 나아가 축제로 발전하게 되는데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고 모두가 참여하는 축제였다고 합니다.
여성들은 높은 신분의 남성과 사귀기를 원했는데, 축제를 빌미로 야외에서 많은 남녀들이 관계를 가졌다고 하네요.
이 때 신분이 높은 사람과 관계를 가진 후 임신에 성공할 경우 신분 상승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는데요
누구에게는 기회였고 누구에게는 범죄가 될 수 있는 양면성을 가진 문화이자 축제네요.

왜 이런 문화가 생겼을까요?

요바이 문화가 생겨날 무렵, 일본에서는 끝없는 전란이 일어나며 남성의 인구가 급격하게 줄었고, 그 반대로 과부는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인구의 증가와 미망인에 대한 구제, 지역사회의 유지인 촌장의 권위 확대 등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만들어졌는데요 노동력의 확보와 부양가족의
재구성, 병사의 충원 등을 위해 권장된 만큼
여성 쪽이 중심이 되는 거부권이 존재해 지역사회의 붕괴를 막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풍습인 만큼 전국으로 퍼지면서 규칙도 다양해지고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네요.
요바이가 성범죄로 이어지는 경우도 숱하게 일어났는데 생존을 위한다고 하지만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은 분명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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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막내절' 여자의 가슴을 만져도 되는 축제가 있다고!??

이번엔 밤문화 축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중국 원난성 쌍백현이라는 지역에 사는 소수민족 ‘이족’은 음력 7월14일부터 3일간 ‘막내절’이라고 불리우는 기간동안 처자들은 한 쪽 가슴을
내놓고 다니며 총각들은 합법적으로 처자들의 한 쪽 가슴을 만져도 된다는 축제입니다.

유래는 중국 역사 속 한 번도 여성의 가슴을 만져보지 못하고 죽은 군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며 ‘막내절’기간동안 여성의 가슴을
만지는 행위가 남자들에게는 길조가 되고 여자들에게는 재수가 좋은 행위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 기간동안 이 고을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도 이러한 풍습은 허용되어 전세게에서 흑심을 품은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다고 하네요
이렇게 하나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밤문화.
‘막내절’은 정말 있는건가? 라는 의문으로 흘러 여러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데요
그 결과? 중국 바이두닷컴을 찾아보면

“막내절의 풍습은 예전에는 잠깐 존재했을지 모르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라고 하며 일단락 되었습니다.
하지만 검색이 어느정도 되는것을 본다면 직접 찾아가보시는게 좋겠네요.

그렇다면 한국은 어땠을까?

남녀칠세부동석과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성생활을 했을까? 그들은 어떤 성풍속과 성문화를 만들었을까? 궁금하다면 조금
오래 된 책(1998년)이지만 정성희가 지은 <조선의 성풍속>에서 우리는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
<조선의 성풍속>에는 결혼·임신·이혼·수절·성범죄·간통·매춘 따위를 통하여 조선시대 성풍속과 성문화를 알 수 있다. 조선 초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린 남존여비와 같은 불평등 사회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조선 초기 결혼 풍습에서 ‘시집살이’가 아니라 ‘처가살이’를 한다고 했다. 심지어 “며느리가 시부모 얼굴도 못 보는 형편이다”라는 말까지
유행했는데 이는 며느리가 시가가 아니라 친정에서 살았음을 보여준다. 시집살이는 2백년도 안 된 결혼 풍습일 뿐이다.
하지만 유교가 조선시대 이념을 자리잡으면서 ‘남녀칠세부동석’ ‘남존여비’가 여성들 삶을 옥죄었다. 양반집 여성들은 바깥 나들이 자유를 제한
받았으며, 불효 중에 후손이 없는 일이 가장 불효라는 사상은 결국 대를 잇는 숙명을 떠안도록 했다.
아들을 낳기 위해 아들 낳은 집 금줄을 일주일 동안 차고 다니거나, 고추있는 금줄을 훔쳤으며, 상가집 상여 만장을 상주 몰래 찢어서
속곳을 해입었다.
경북 안동에서는 우물이나 냇물에 세로로 떠 있는 작은 나무토막이나 마디가 있는 짚토막을 물과 함께 마시면 아들을 낳는 ‘공구 뜬 물
마시기’라는 풍습까지 있었다. 심지어 “뒷간의 똥물이라도 마실 정성이 있어야 아들을 보는 것”이라는 말까지 있었다니 조선시대 여성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있다.
여성들은 아들을 낳지 못하면 ‘칠거지악’ 중 하나를 어겼기에 언제든지 버림을 받을 수 있었지만 부인들이 남편을 버릴 수는 없었다.
아내가 남편에게 욕설만 해도 이혼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수절은 여성이 가야 할 길었으며, 재가도 금지되었다. 왜 조선은 재가를 금지했을까?
정성희 설명을 들어보자.

밤문화 누름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대개 전남편 집에 두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고려나 조선 초기까지 재가하는 여성이 자녀를 데리고 가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재가는 자식이 어느 아버지의 성씨를 따를 것인가 또는 어떠한 상복을 입을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남자 위주의 가계계승에
적지 않은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이렇듯 여성들의 재가 금지는 가계계승에 있어서 순수 혈통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남성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여성의 정절은 단지 구실일뿐이었다.”(122쪽)

조선의 성풍속 밤문화

순수 혈통을 위해 재가까지 금지했던 조선 양반네들은 부인만 평생 사랑하고, 함께 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기녀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기녀들을
허용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아내 없는 변방 군사들을 위해서”였다.
기녀들과 함께하니 스캔들도 일어났다. 국상과 부모상을 당했는데도 기녀와 사랑을 나누다가 탄핵받아 파직되거나 곤장을 맞거나, 상투가 잘린
관리도 있었다. 예를들면 조선 태종 때 정승까지 지낸 조영무 아들 조윤이다. 태종은 조윤에게 “부친을 배반하고서 어찌 아비의 음덕을 입겠느냐”며
곤장 1백 대를 때렸다고 한다.


상투 잘린 관리는 세종 때 이조정랑을 지낸 이영서이다. 기녀와 간통을 하다가 발각되어 가족들에게 상투가 잘리는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영서는 생원 시절 성균관에서 일하는 종의 처를 범했다가 상투가 잘렸다. 이 때 병조정랑 이현로는 이영서에게 “자네 머리털
은 꼭 베면 다시 나는 부추나물일세그려”라고 했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조윤은 곤장 백 대를 맞았고, 이영서는 상투가 잘렸지만 여성이 간통을 했다면 사형이었다. 조선의 성풍속 물론 세종 때 ‘감동’ 같은 자유부인도
있었지만 이는 조선 초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조선의 성풍속>는 19세기에 접어들면 성희(性戱) 묘사를 직설적으로 담은 춘화집이 유행한 사실도 실었다. 춘화는 풍속화가로 잘 알려진
김홍도와 신윤복이 많이 그렸다고 한다. 이들이 춘화를 그린 것에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성’이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 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당대 최고 조선의 성풍속 화가였던 김홍도와 신윤복의 작품으로 전하고 있는 춘화들은 사실성과 예술적 격조를 갖춘 작품들이다. 따라서 이런 유의
그림들이 빠지기 쉬운 음란 외설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높은 희화성을 지니고 있다.”(245쪽)
조선시대에는 동성애도 있었다. 동성애는 구중궁궐에서 한 평생 한 남자(왕)만을 바라보았던 궁녀들 사이에 심심치 않게 있었다. 세종대왕은
며느리를 두 번이나 폐출시켰는데 두 번째 며느리이였던 세자빈 봉씨는 궁궐 여종 소쌍이란 여자와 동성애 때문에 폐출되었다.
이렇듯 조선시대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종속된 성풍속과 성문화였음을 <조선의 성풍속>는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밤문화 만짐